Skip to menu

Data

예슈아 추체험의 현장

2007.05.07 18:42

윤사무엘 Views:3375 Recommend:246

예슈아 추체험(追體驗)의 현장

 

        김시환목사(예슈아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예수를 추체험하는 일은 예수를 만난 성경인물을 좇아가면, 손쉽게 이루어진다.

  그러한 인물들은 우리와 같은 자연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인한 그들의 감격과 전격적인 변화의 체험은 예수 자신처럼 너무 높거나 너무 깊지 않다. 쉽게 우리가 이해하고 함께 느낄 수 있는 수준의 내면 경험을 보여준다. 그래서 먼저 그런 인물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살피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가령, 그러한 성경 인물 가운데 삭개오는 비교적 쉽게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예수 체험을 지닌 이이다. 그의 예수 체험에는 소위 신비의 요소가 없다. 또한 난해한 신학적(神學的) 요소 역시 별로 없다. 동시에 그 당시 사건 전개 자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하는 요인들도 별로 없다. 그래서 그를 좇아가면, 예수로 인한 그의 감격과 전격적(電擊的)인 변화를 쉽게 그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변화는 인간의 내면에서 변화가 가장 어려운 편에 속하는 ‘이성(理性)의 치유’ 케이스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보다 더 한 신비가 없고, 이보다 더 한 기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변화 원인과 과정에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체험하는 영적 신비는 모두 인간의 합리적 이해의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인식이나 이해가 아예 불가능한 경우와는 이런 점에서 아주 다르다. 그래서 삭개오의 회개와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어떤 기적이나 신비의 요소(초자연적 요소)도 자연스럽게 신뢰하며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 사이에 소개된 삭개오 사건을 여기에선 좀 쉽게 삭개오 자신의 내면체험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그래야 예수님과의 만남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제대로 읽으려면, 삭개오가 겪은 충격과 변화에 자신을 동조(同調)시켜야 한다. 그와 같은 동조는 몇 가지 바른 질문에 의해 가능하다. 아래에 기록한 ‘삭개오의 고백’은 이러한 고찰 결과로 나온 글이다. 삭개오의 내면을 ‘예수 추체험 원리’를 좇아 재구성한 후, 그것을 다시 이 질문을 따라 분석했더니, 자연히 이런 삭개오의 고백이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 고백에서는 ‘일곱 번째 질문’과 관련된 내용은 일단 유보(留保)하고, 이 시리즈의 연구에 참여한 이들의 글을 소개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그 부분의 삭개오 고백은 학습자들 자신의 신앙고백을 끌어내는 부분이어서, ‘학습자들의 몫’으로 남겨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첫째 질문; 삭개오는 예수님과 만나기 전에 예수님에 관해 무엇을 알았을까?

  둘째 질문; 그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였을까? (예수와 비교하며 무엇을 고민했을까?)

  셋째 질문; 돌 무화과나무(뽕나무) 위로 기어오른 삭개오의 심정을 분석해 보자.

  넷째 질문; “오늘 밤 네 집에 유하여야겠는데-”하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삭개오는                 어떤 충격을 받았을까?

다섯째 질문; 예수님을 앞서 집으로 달려 들어오는 동안, 삭개오의 마음속에서 샘처럼 솟아                오른 감격의 말들을 기록해 보자.

여섯째 질문; 삭개오는 예수님의 사랑에 어떤 응답을, 왜 하게 되었는가?

일곱째 질문; 이 삭개오의 대변화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언적 축복’을 포고(布告)하               셨을 때와 않았을 때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런 예수그리스도의               축복은 오늘의 인간 내면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삭개오의 고백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 ”      < 누가복음 19:5-6 >


        삭개오에 관한 성경기록을 읽으며 문득 감격적인 한 장면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삭개오가 친구들에게 자신이 변화하게 된 동기를 잦아들 듯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예수께서 삭개오 집을 방문하시고서 며칠 뒤 어느 황혼 무렵, 그의 서

      재 창가에 앉아 떠듬떠듬 그 고백을 시작했다.


                      

               - 진리의 영을 보내시는 예수님 -

   삭개오는 예수님과 만나기 전에 예수님에 관해 무엇을 알았을까?



  자네들, ‘그 부르심’을 받은 일 있나?

  한번 받고 보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떨리지. 암, 떨리고말고.

  돈이고 권력이고 모든 소유가 어린애 장난감 같아져요.

  문득 어딘가로부터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 음성,

  하지만 그 메아리는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또 다시 목마르게 기다려지는 그 음성,

  그런 음성을 어디서든 만난 적 있는가?

 “삭개오!”하고 그분이 불러주시는데,

 나는 꼭 벼락을 맞는 것 같았어!

 나를 향해 화안히 웃으시는 그분 눈과 마주쳤을 때,

 까닭 모를 감격으로 목이 메어오는데, ....

 느닷없이 꼭 목욕을 시원히 한 느낌이 덮치드구만.

 그래, 맞아! 그분 웃음은 말야,

 맑고 시원한 물이야, 물!

 아니, 그뿐 아니라 햇빛이지, 부드러운 아침 햇살!

 그게 왜 그런지, 자네들 짐작이 가나?

 그분 웃음은 말야, 얼굴로만 웃으시는 게 아니더군.

 온 몸으로, 아니 온 생애로, 햇덩이처럼

 나를 반가와 하시는 웃음이었어.

 난, .... 그분 그때 처음 뵙는 분이었어.

 그런데 말야, 전혀 낯설지를 않아!

 그냥 처음부터 당연히 알아오신 분 같아.


 글쎄, 처음 뵙는 분이 내 이름을 부르시는데,

 세상에, 나는 그분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증 같은 것은 전혀 일지 않고,

 그냥 내쳐 “예, 저 여기 있어요!”하고 소리치려는 거야.

 한데, 그게 목소리보다 몸이 앞서서 가더라구.

 그러니, .... 그 나무 위에서 쭈루룩 미끄러져 떨어질 수밖에 - 

 손이 까지는 것도 몰랐고, 엉덩방아 찌는 것도 몰랐고, ....


 그러니까, 이걸 뭐라 해야 하나? 그래 맞아!

 처음으로 제 엄마 알아보고 웃는 애기를

 알아 듣거나말거나 얼르며 그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

 아니, 어려서 잃어버렸던 자식을 찾은 아버지가

 한달음에 고아원까지 달려와 이름을 부르는데,

 어린것이 제 아비 얼굴도 모르면서도 무조건 품에 뛰어들며

 “아빠, 왜 인제 와?”하고, 와앙하고 우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허 참, 글쎄, 그분께서 나를 보시고는

 ‘이스라엘의 피를 빠는 독충(毒蟲)’이라 하시지 않고,

 ‘내 잃어버린 양 새끼’라고 하시는 거야.

 내가 보아도 나는 징그러은 독충인데 말야!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거침없이 ‘삭개오야!’하고 부르시는데

 “너도 네 이름 뜻대로 정결해질 수 있느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내겐 들리더군.

    


                      II


               - 진리의 영의 임재징후 I -

          그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였을까?

          (예수님과 비교하며 무엇을 고민했을까?)


 가령, 말썽을 일으킨 개구쟁이가 집에서 도망 나갔다 치세.

 어둡기까지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찾아 나선 부모가

 분노로 혼내주려는 마음으로 나서게 되겠는가?

 애 이름을 부르며 안타까이 찾을 뿐이지.

 설령, 애가 저를 찾아낸 제 강아지를 냅다 발길질해 쫓아 보내고,

 집에다 돌팔매 질 하고, 동네 아이 빵을 빼앗고 두들겨 팼다 치세.

 이런 애는 매로만 다스리려 해서는 안 되는 법일세.


 그런 사람은 사람 기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

 좀 비뚤어지긴 했지만, 아이가 도망한 후의 말썽들은

 모두가 사랑을 달라는 외침이요, 몸짓이요, 마음 짓들 아닌가?

 외로움에 겨워, 미움에 겨워, 반항해 본 것에 불과한 거야.

 그 개구쟁이 녀석, 제 똥강아지 발로 차서 쫓아 보낸 후,

 제풀에 지쳐 바위 밑 아늑한 곳에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깊은 숲에서 깨어나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


 혼자 훌쩍거리며 얼마나 무서움에 시달릴지,

 엄마 아빠를 찾으며, 얼마나 잘못을 후회할지,

 그걸 알아주어야 어미 아비 노릇할 자격 있는 법이지, 안 그런가? 

 그 숲에서 관솔 불빛에 얼핏 드러난 녀석을 찾거든,

 그저 두 말 없이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려 주어야 해!

 그렇게만 되면, 녀석은 제 잘못을 나무라지 않아도,

 아비 품에 안겨, “다시는 안 그럴 게, 아빠!”하고 눈물 쏟을 게 뻔하지.


 나 같은 ‘독충 인생’도 제 새끼 일이라면

 그렇게 돌보는 것이 도리라는 것쯤  모르지 않네.

 하물며 하늘에 계신 .... ‘우리 아버지’께서야

 그 얼마나 드높고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겠는가!

 난 말야, ‘그분’을 뵈온 후로는 온 세상 가득히

 하나님 웃음과 눈물로 가득 찬 느낌일세.

 그리고 그 눈물과 웃음 중심엔 늘 ‘그분’이 계시고 - 


 어떻게 된 셈인지, 그분 뵙고 나니까

 문득 그 개구쟁이 생각이 나더라구. 아, 글쎄

 그분이 이 독충 같은 놈을 꼭 그 애처럼 안아 주시니 -.

 전엔 내가 나를 보아도 흡혈독충(吸血毒蟲)이었지.

 그러고도 모자라 언제나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

 더 화내고 더 미워하며 심술을 부려오지 않았나?  

 그런데 그분은 .... 그런 나를 왜 그리도 믿어주시지?


 나를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은 그뿐이 아니야.

 이제껏 못 보았던 내 모습이 화안히 드러나는 거야, 글쎄.

 내가 남을 못 믿었던 것은 나 스스로를 못 믿었기 때문이었어!

 내가 남을 증오한 것은 스스로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분이 오셔서 한번 나를 안아주시며 용서하시니까

 나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되더군.

 그러니 당연히 남도 너그러이 대할 수 있게 되고-. 허허, 참!

   



                     III


             - 진리의 영의 임재 징후 ii -

     작은 키를 부끄러워 않고 돌 무화과나무(뽕나무)

     위로 기어오른 삭개오의 심정을 분석해 보자.


 그래, 바로 이것이야!

 그분은 내 지난날의 잘못들을 꿰뚫어 보셨음에도,

 내 등을 토닥거려 주셨던 거야.

 길 잃은 새처럼 탐욕의 그물에 걸려 몸부림치는 양심,

 은밀히 속으로만 속으로만 가라앉아 얼어붙는 눈물,

 그분은 바로 이런 내 치명적인 공포감까지도 보셨던 거야.

 메마른 정의의 눈이 아닌 사랑의 눈길이었기에 -


 그래, 맞아! 바로 이거야.

 내 스스로도 부끄러워한 나 자신을

 꺼리지 않고 끌어안아 주시더구먼.

 그랬더니, 감개무량해 하는 내게 새로운 게 보여!

 당장 내 집 심부름하는 애들이 달리 보여요.

 전에 볼 수 없었던 이쁜 구석들이

 하나하나 눈에 띄더라구.


 그분을 뵈오려 했던 내 행위가

 그런 분의 사랑을 바라는 목마름에서였다는 것을

 난 미처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었지.

 한데, 세리(稅吏)인 마태를 제자로 삼았단 얘기를 듣고부터는

 내 가슴이 군시렁거려 못 배기겠는 걸 어쩌나?

 더구나 말일세. 이 마을 들어오시기 바로 직전에

 어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얘기를 그분이 하셨다는 데 -


 그 바리새인은 성전 앞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오, 하나님이시어, 저는 저 더러운 세리와 달리

  토색(討索)이나 간음이나 그 외에 어떤 불의도 멀리하고,

  모든 율례(律例)와 안식일을 지켰고, 주께 십일조를 드려왔나이다.

  주께 영광이 되는 내 의로움을 보소서.“ 하고 기도 했대나?

 그러나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뵙지도 못하고 뒷 구석에서

 “하나님이시어, 이 죄인에게 자비를-”하고 가슴만 쳤다는구만.

Up